2007년 05월 11일
[인물] 정은임 (鄭恩任, 1968~2004)

정은임 (鄭恩任, 1968~2004)
참조 링크
정은임 추모사업회 홈페이지 : http://www.worldost.com/
위키피디어 : http://ko.wikipedia.org/wiki/%EC%A0%95%EC%9D%80%EC%9E%84
은임이 다락방 (故정은임 미니홈피) : www.cyworld.com/bastian2004
MBC FM 정은임의 영화음악 : http://www.imbc.com/broad/radio/fm4u/jcinemusic/
필름 2.0 정은임 관련기사 검색 : http://film2.co.kr/search/searchresult.asp?sid=-1&page=1&division=feature&text=%C1%A4%C0%BA%C0%D3&x=22&y=0
정은임 아나운서 2주기 관련기사 : http://blogbbs1.media.daum.net/griffin/do/blognews/etc/read?bbsId=B0008&articleId=6241&pageIndex=1&searchKey=&searchValue=&nil_profile=g&nil_NewsImg=4
미디어 오늘 : 라디오 시대 마지막 스타가 떠났다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058
인물 소개
정은임(1968년 10월 13일 ~ 2004년 8월 4일)은 MBC의 아나운서이다. 〈정은임의 FM 영화음악〉을 진행하면서 청취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왔기 때문에 '라디오 세대의 마지막 DJ'로 불린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87학번)하고 1992년 7월에 MBC에 입사했다. 흔히 '정영음'으로 줄여부른 〈정은임의 FM 영화음악〉을 진행했다. 당시 영화 관련 정보에 목말라하던 청취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면서, 새벽 1시에 방송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기를 끌었다. 강제철거의 부당함을 고발하는 내용을 오프닝 멘트로 방송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이나 볼셰비키의 〈인터내셔널〉을 방송에 내보내기도 하는 등 영화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도 사회참여적인 내용을 방송하기도 했다. 리버 피닉스의 팬임을 여러차례 밝히기도 했고 리버 피닉스가 1993년 10월 31일에 사망하자, 방송에서 이 사실을 전하면서 울먹인 일화가 있다. 정영음은 1992년 11월 2일부터 방송을 시작해서 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95년 4월 1일에 폐지되었다. (정은임 아나운서는 당시 파격적인 라디오 진행과 또 손석희 아나운서와 함께 유일하게 "노조 결성 거부 각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하는 등의 행동으로 MBC 간부들로부터 미운털이 있는대로 박혀있었고 그 때문에 방송이 폐지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때문에 정은임 아나운서는 이후에도 메이저 방송을 맡지 못하고 마이너 방송에서만 활동해야 했다고 한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2000년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한국의 영화마니아'를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3년 10월 21일에 다시 방송을 재개하였으나, 2004년 4월 25일에 다시 폐지되었다.
2004년 7월 22일 오후 서울시 흑석동 삼거리에서 차량이 전복되는 교통사고를 당했고, 뇌부종에 이은 합병증으로 2004년 8월 4일 사망했다. 장례는 MBC 사우장(社友葬)으로 치러졌다. 유족으로 남편 조모씨와 아들이 하나 있다.
출처 : 위키피디어
수정ㆍ보충 : 임준형 (붉은 글씨 부분)

2003년 10월 22일 고공 크레인
새벽 세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00여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올 가을에는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 겠다구요.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 겨우 매달려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저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1. <빵과 장미> George Fenton - Maya Working
2. <토이 스토리 2> Sarah McLachlan - When She Loved Me
3.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 이병우 - 조원의 아침
4.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 이병우 - 소옥과 인호
5. <정사> Mercedes Sosa & Francis Cabrel - Yo Vengo A Ofrecer Mi Corazon
6. <하이 힐> Luz - Piensa En Mi
7. <홀랜드 오퍼스> Len Barry - One, Two, Three
※
정은임 추모사업회 홈페이지 (http://www.worldost.com/)에서
"MBC FM 정은임의 영화음악"의 지난 모든 방송분을 다시듣기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추모, 정은임 FILM2.0(2003년 10월, 149호) '돌아온 DJ 정은임'
출처 : 필름 2.0 (2004-08-04) (http://film2.co.kr/feature/feature_final.asp?mkey=2397)
글 : 김세윤 기자

교통사고로 중태에 빠졌던 정은임 아나운서가 4일 결국 숨을 거뒀다. 사망 소식이 전해진 2004년 8월 4일 저녁, 5천 여명이 넘게 다녀간 그녀의 미니홈피를 비롯해 각종 포털 사이트에는 수많은 추모 댓글들이 붙고 있다. 이젠 많은 이들의 가슴에 남게된 정은임 아나운서를 추모하며 지난해 10월 방송복귀 소감을 밝혔던 FILM2.0 기사를 다시 싣는다.
정은임 아나운서가 8년 6개월 만에 MBC FM 영화음악 진행을 다시 맡는다. 그 소식이 전해진 10월 23일은 1995년 <정은임의 FM영화음악>(이하 정영음)이 막을 내린 지 꼭 3,117일째 되는 날이었다. 마침 그날은 그의 서른다섯 번째 생일이었다.
"과연 축하할 일일까요?"
복귀 소식이 전해진 다음날. 여의도 MBC 본사 7층 라디오 스튜디오 앞에서 만난 정은임은 지나는 사람들이 건네는 축하 인사에 꼬박꼬박 그렇게 되묻고 있었다. "당연히 부담되죠. 복귀라면 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가는 건데. 지금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잖아요?" '그때'라면 1992년 11월 2일에 첫 방송을 시작해 1995년 4월 1일 정영음의 마지막 전파를 쏘아올리던 때를 말한다. 소녀 취향의 닭살 멘트가 난무하는 심야 방송에서 4.3 제주 항쟁의 희생자를 추모하고 강제 철거의 부당함에 격분하는 오프닝 멘트가 화제를 모은 건 당연했다. 볼세비키가 부르던 '인터내셔널가'와 시위 현장에서 대학생들이 부르던 '임을 위한 행진곡'을 영화음악이라며 틀어주던 이 프로그램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듣게 해준 방송이었다.
2년 반 만에 맞이한 드라마틱한 마지막 방송. 이 때부터 독실한 애청자들이 정영음을 실패한 혁명으로, 정은임을 요절한 게릴라로 신격화하기 시작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정은임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라고 눈물의 작별 인사를 고하던 마지막 방송은 MP3 파일로 저장되어 지금도 인터넷을 떠돈다.
"안 그래도 내가 그랬지. 정은임은 전설로 남겨두고 차라리 다른 사람을 섭외해야 한다고.” 정은임의 복귀를 축하하는 점심을 함께하며 홍동식 편성부장(당시 정영음 PD)은 끝내 자신의 충고를 새겨 듣지 않은 담당 PD를 은근히 대견해 했다. 그러면서 오는 2005년 정영음 종영 10주년을 맞아 화려하게 복귀시키려던 자기 복안이 틀어졌다며 정은임의 때이른(?) 복귀를 아쉬워하기도 했다.
당시 이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한 평론가 정성일은 "지금도 마치 커밍아웃하듯이 '저도 한때 정영음의 청취자였습니다'라며 말을 걸어오는 사람을 만난다"고 말한다. 정은임은 그렇게 청취자들 사이에 은밀한 연대의식을 고취시키던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설익은 대학생의 세계관으로 방송하고"도 박수받던 호시절은 다시 올 수 있을까? 이제 마이크 너머엔 영화에 담긴 진심을 믿는 충성스런 관객들 대신 박스오피스 성적을 더 믿는 변덕쟁이 관객들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다. 페널티 킥을 맞이하는 골기퍼처럼, 지금 정은임은 11년 전 입사 4개월 만에 덜컥 영화음악 진행을 맡던 그 때처럼 불안하다. 차이가 있다면 예전엔 너무 몰라서 불안했고 지금은 너무 잘 알아서 불안하다는 것이다.
"대학교 1학년 때 모두들 군대 가 있는 어느 선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뭐, 완전히 신화적 인물이더라고요. 짱돌의 달인에, 강철 같은 사상. 제가 4학년 때 그 선배가 복학하는데 아, 그 신화가 산산히 깨졌다는거 아닙니까. 모든 신화의 속성이란 다 그런 거예요."
92년 11월 2일 첫 방송을 시작하기 전까지 정은임은 아나운서라는 직업에 대해, 방송국이라는 직장에 대해 내심 실망하고 있었다. MBC 파업에 즈음해 입사한 이 수습 사원은 파업에 참여한 선배들을 대신해 일기 예보에 투입됐다. 찌푸린 날씨를 예보할 때면 잔뜩 먹구름이 끼여 있는 자신의 미래도 함께 예보하는 것만 같았다.
세상의 중심에서 호흡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 방송은 자본의 논리로만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그저 순진한 대학생 마인드였음이 속속 드러나는 순간, 87학번 아나운서의 가슴속에 회의가 밀려들었다. 특히 '앵무새'라고 지탄받던 아나운서의 한계가 뼈아팠다. 못다 이룬 기자의 꿈을 실현할 대안이라고 믿었던 그로서는 견디기 힘든 시절이었지만 머지 않아 '아나운서' 정은임은 기자가 되었다면 절대 누리지 못했을 꿈같은 시절을 만끽하게 된다.
종영 전까지 매주 한 통씩 꼬박꼬박, 70여 통에 달하는 장문의 편지를 써 보내 제작진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대구의 서영무(38)씨와 숙직하는 ‘은임이 누나’와 밤새 수화기를 붙들고 영화를 논하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주던 민철호(33)씨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열혈 청취자 중 빨리 기억나는 일부일 뿐이다. 하지만 날카로운 직관으로 청소년의 가슴을 할퀴던 정은임을 모두가 예뻐한 건 아니었다. 95년 4월 1일, 정영음은 봄 개편과 함께 막을 내렸다. 그리고 정은임의 인생에도 개편의 계절이 도래했다.
영화음악 종영 후 몇몇 프로그램을 오가며 영화 코너에 얼굴을 비추던 정은임은 98년, 결혼과 동시에 유학길에 올랐다. 이미 정영음의 마지막 방송에서 영화 공부를 더 하고 싶다던 속내를 털어놓은 터였다. 항간에는 영화 연출을 공부하러 간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로부터 2년 뒤. 가슴속에는 미래에 대한 고민을 안고 팔에는 아이를 안고, 정은임이 돌아왔다.
"사람이 보수화되는 가장 큰 이유가 가족이 생기는 거예요. 특히 2세가 생기면 생각이 달라지죠. 나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사는 건 할 수 있겠는데 결코 우리 아이에게는 나의 신념을 관철시키지 못할 것 같거든요. <허공에의 질주>를 떠올리며 생각해요.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 요즘은 그게 가장 큰 화두예요."
"그게요, 아이 참. 그러니까 막상 가보니까 영화학과가 아닌거예요. 미디어학과인 거 있죠? 뭘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거야" 뭘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일을 시작하는 건 정은임의 특기다. 아나운서 시험을 볼 때도 그랬고, 정영음을 시작할 때도 그랬다. 그는 그럴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나름의 돌파구를 찾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팔자에도 없는 경영학 수업까지 받아가면서 그는 비로소 영화라는 텍스트 바깥을 살펴볼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세계관을 정리하고 돌아왔다"는 거창한 자평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2년이나 유학하고 돌아온 사원에게 1년 내내 이렇다 할 프로그램 하나 맡기지 않았다. 시간은 많았다. 그러나 이상하게 영화 볼 시간은 자꾸 줄어들었다. 아직 공부를 마치지 못한 남편을 남겨두고 먼저 들어와 혼자 아이를 키우니까 그럴 수밖에.
"영화를 보지 못하는 환경을 못 견디겠더라고요. 밤 12시까지 아이 뒤치다꺼리 하더라도 꼭 새벽 3시까지 영화 1~2편씩 보고 나서 잤어요" 연애 시절 유학중인 남편과 6개월에 한번씩 만날 때도 그럭저럭 버틸 만했건만, 영화는 아니었다. 보고 싶은 영화를 보지 못하며 사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 정은임은 지금도 점심시간에 회사를 빠져나가 가까운 극장으로 간다. 보고 싶은 영화를 빨리 보지 못하면 목에 가시가 돋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이 불치병은 정은임의 아버지에게 1차적인 책임이 있다. 부친은 어린 정은임의 손을 잡고 극장 나들이를 일삼았다. 고등학교 때 정은임의 증세가 더 심해졌다. TV 영화를 빼놓지 않고 보고 난 후 영화 제목, 제작 연도, 제작사, 남녀 주인공, 영화 줄거리, 그리고 나름의 감상을 공책에 빼곡히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디아나 존스>의 영향을 받아(?) 들어간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학부 시절,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 앞에 잠시 흥미를 잃기 전까지 그의 이런 식의 영화 보기는 계속됐다.
정은임을 열혈 영화광의 세계로 최초로 인도한 안내자는 사실 아버지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 약사 엄마를 대신해 집안 일을 돌봐주던 가정부 언니였다. 장롱 가득 영화 잡지를 쌓아놓고 영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늘어놓는 가정부 언니를 보고 어린 정은임은 생각했다. "가정부가 되면 참 좋은 거구나, 영화도 많이 보고 과자도 마음대로 먹고, 참 좋은 직업이구나.” 가정부가 되고 싶다는 장래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정은임은 그 때부터 영화 사랑의 한 길을 걷게 된다.
"연변에서 오신 아줌마가 먹고 자면서 애를 봐주세요. 근데, 웃긴 게 제가 난생처음 사용자가 된 거잖아요. 그 미묘한 갈등, 임금 인상을 둘러싼 대립을 겪어요. 근데 저도 별 수 없이 기만적인 기업들이 쓰는 ‘패밀리’ 논리를 내세우게 되더라고요. 우린 한 가족이다, 이러면서 인간적 정을 내세워 무마하는 거예요"
입사 11년 차 정은임의 나이도 벌써 서른여섯이다. 일전에 <일요일 일요일 밤에> '브레인 서바이버' 아나운서 특집에 출연했더라면 입사 동기 김지은 아나운서와 함께 가운뎃줄, 일명 낙엽줄에 앉을 나이다. 이제 그는 정영음을 진행하던 시절 ‘내 인생의 영화’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던 <로저와 나>를 얼마 전 슬그머니 목록에서 빼버렸다. 그때는 거대 자본가에게 끊임없이 문전박대당하는 감독(마이클 무어)이 존경스러웠지만 세상을 조금 살아보니까 재기발랄함과 무모함, 그 이상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정은임은 신입 아나운서 시절 한 인터뷰에서 어느 간부가 "정은임은 동그라미와 가위표밖에 없다"고 말해서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었다. 당시 한 선배가 그 간부를 지칭해 “그 인간은 세모와 네모밖에 없다"고 말한 것에 용기를 얻기도 했다. 정은임에게 여전히 당신에겐 동그라미와 가위표밖에 없느냐고 물었다. 정은임은 "자기 주장이 강하고 날카로운 것 못지않게 사람에 대한 연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남편이 돈 많이 벌어서 재단이나 하나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농담조로 이야기한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서란다.
잃어버린 줄 알고 새로 신청하고 또 잃어버린 줄 알고 신청해 현재 주민등록증만 4장을 갖고 있을 만큼 제 물건을 간수하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정은임은 입사 당시 품은 초심만큼은 아직 잘 간직하고 있다. 그는 올해 MBC노조 여성부장직을 맡았다. 직장내 탁아소 설립이 당면 과제다. 또한 여전히 노조 노래패 소속이기도 하다. 최근 노조내 그룹 사운드의 공연을 보고 의기소침해 있긴 하지만.
그가 복귀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날, 다음 카페 '정은임을 사랑하는 사람들' 게시판은 난리가 났다. 한때 정은임 복귀 추진 모임(이하 정추임)이 결성될 만큼 열성 청취자를 거느린 프로그램의 종영 이후 8년. 사실상 복귀 운동을 포기하고 간간이 서로의 안부나 묻던 회원들이 동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꿈인지 생시인지 제 살을 꼬집어 보겠다는 글이 올랐고 벌써 꼬집어 봤는데 꿈은 아니라는 리플이 달렸다. 복귀 후 첫 방송 전날인 10월 19일 저녁 '정영음 부활 전야 정모'를 열기로 하면서 카페의 축제 분위기는 극에 달했다.
이 카페 회원이면서 그 옛날 숙직하는 정은임에게 세레나데를 불러주던 애청자 민철호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우리는 정은임 개인의 복귀가 고마운 게 아니라 진지하게 영화를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부활하는 게 고마운 것"이라고 말했다. 편지 70통의 주인공 대구의 서영무(38)씨는 "그동안 정은임씨도 변했겠지만 듣는 우리도 많이 변했다"면서 그냥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해달라"고 주문한다. 그들이 기다리는 건 투사(鬪士) 정은임이 아니라 삶을 투사(透寫)하는 영화 이야기를 들려줄 인간 정은임일 뿐이다.
정영음이 막을 내린 지 3,119일째 되는 지난 10월 15일. 게시판에 오른 한 청취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어린 감수성을 자극하고, 때로는 쓰다듬어주던 그 라디오, 지금은 낡은 옷가지들과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을 낡은 라디오를 창고에서 꺼내 깨끗이 사과하고는 탁탁, 경쾌하게 먼지를 털어내야겠습니다." 부디 그래주기를. 뿌옇게 내려앉은 먼지와 함께 자신에 대한 지나친 기대도 탁탁, 경쾌하게 털어내주길, 정은임은 바라고 있다.
사진 조완 기자

추모 정은임
출처 : 필름 2.0 (2004-08-09) (http://film2.co.kr/feature/feature_final.asp?mkey=2404)
글 : 신기주 기자
지난달 22일 교통사고를 당해 중태에 빠졌던 MBC 정은임 아나운서가 8월 4일 오후 6시 반, 결국 세상을 떠났다. 90년대 초반부터 라디오 프로그램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등을 진행하며 영화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세상을 향한 신실하고 심지 굳은 태도로 대중과 호흡했던 그다. FILM2.0은 그가 남긴 말과 글 중 일부를 발췌하는 것으로 추모를 대신한다.
안녕하세요,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1992년 11월 2일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첫 방송 오프닝 멘트
초콜릿과 사탕, 여자 친구, 남자 친구, 선물. 3월 14일은 그렇게 요란하게 지나갔습니다. 화이트 데이라고요.... 그렇다면, 3월 15일 지난 하루를 여러분은 어떻게 기억하십니까? 3.15 마산의거. 4.19혁명의 씨앗이 된, 우리 역사의 달력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날이죠. 35년 전 마산 땅을 울린 그 민주의 함성이 이제는 거대한 사탕 더미에 깔려 신음 소리로 변하고, 또 어느새 우리의 달력에서는 사라져 버린 날이 된 것 같네요.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현대 사회에 있어서 한 마을에 이집 저집이 동시에 제사를 맞게 되는 것, 그곳은 슬픔과 공포의 역사일 따름이지요. 양민 학살이 자행되었던 거창군 신원면, 경찰 총기 난동이 있었던 의령군 궁유면, 4월 3일을 영원히 잊지 못할 제주, 그리고 아직 채 시신도 인양하지 못하고 있는 부안군 위도 마을, 모두 한날 한시에 제사를 지내야 하는 곳입니다. 아깝게 목숨을 잃은 분들의 명복만 빌 뿐입니다.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자신보다 더 유명한 소피 마르소를 데리고 프랑스 대통령이 방한했습니다. 고문서 반환이라는 선물을 앞세워서요. 프랑스 대통령 최초의 방한을 환영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렇게 반환할 수 있는 것이라면 왜 진작 돌려주지 않고 하필 고속철 TGV가 선정된 뒤일까요?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홍대 앞에서 여의도까지 오는 데 2시간 30분이 걸려도 코스를 잘못 잡은 자신을 탓하기. 내가 사는 아파트가 바다 모래로 지어졌다는 것이 밝혀져도 이사 잘못한 자신을 탓하기. 다리가 무너져도, 그래, 체중 많이 나가는 우리가 너무 많이 지나갔어, 이렇게 생각하기. 앞서 말한 행동 강령은 대학민국 국민으로, 서울 시민으로 묵묵히 살아가는 데 필요한 철칙이었습니다.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신청하신 곡은 영화 <파업전야>의 '임을 위한 행진곡'. 금요일 첫 곡이었습니다. 천리안으로 어느 분이 이런 글을 올리셨네요. 요즘은 신문에 읽을 거리가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읽어야 할지 모를 때가 있어요. 국내뿐 아니라 세계가 온통 아수라장이 돼가고 있는 것 같아서 정말 슬퍼요....우리 늦기 전에 시작합시다. 한방울의 물이 모여서 거대한 폭포가 일듯 우리 한 사람의 힘이 점점 파문을 일으키면 뭔가가 변화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셨죠?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꽃피는 날 그대와 만났습니다. 꽃 지는 날 그대와 헤어졌고요. 그 만남이 첫 만남이 아닙니다. 그 이별이 첫 이별이 아니고요. 제가 좋아하는 시인 구광본 시인의 시 중에서 한 구절로 오늘 시작했는데요. 시구는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반대네요. 제가 92년 가을에 방송을 시작했으니까 꽃 지는 날 그대와 만났고요. 이제 봄이니까 꽃피는 날 헤어지는 셈이 되었네요. 오늘 여러분과 만나는 마지막 날인데요. 덜덜 떨면서 첫 방송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아침 햇살이 남다르게 느껴지거나 책을 읽다 멋진 글을 발견할 때면 맨 먼저 떠올렸던 게 바로 이 시간이었습니다. 저 정은임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1995년 4월 1일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마지막 방송 클로징 멘트
대학교 3,4학년 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사회는 또 어떠해야 하나, 그런 문제들 때문에 고민에 빠졌었거든요. 87학번이니까 그때의 친구들도 다 비슷한 고민들을 했을 것 같은데... 그런 대학 시절을 보내고 방송국에 들어오면서, 다르게 말하면 사회인이 되면서 나도 모르게 잊어버리는 생각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내 이전의 정체성과 지금 처한 환경과의 괴리에 불편해 하면서도 물들어가는... 마이클 무어 감독의 <로저와 나>는 내가 가졌던 생각들을 단번에 환기시켰고, 그것을 잊고 있었다는 생각에 그때 얼마나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는지 몰라요.
영화 월간지 'KINO'와의 인터뷰
영화를 보지 못하는 환경을 못 견디겠더라고요. 밤 12시까지 아이 뒤치다꺼리 하더라도 꼭 새벽 3시까지 영화 1~2편씩 보고 나서 잤어요. 사람이 보수화되는 가장 큰 이유가 가족이 생기는 거예요. 특히 2세가 생기면 생각이 달라지죠. 나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사는 건 할 수 있겠는데 결코 우리 아이에게는 나의 신념을 관철시키지 못할 것 같거든요. <허공에의 질주>를 떠올리며 생각해요.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 요즘은 그게 가장 큰 화두예요.
'FILM2.0'과의 인터뷰
그때는 영화를 다루는 매체가 많지 않아 라디오 영화 프로그램의 영향력이 컸습니다. 때마침 ‘문청(문학 청년)’들이 ‘영청(영화 청년)’으로 바뀌며 문화 담론이 폭발하던 시기였고, 제 프로가 바로 그런 열기의 창구였지요. 이제는 영화 문화 환경이 많이 달라졌고, 영화가 일상인 시대를 살고 있죠. 청취자도 달라졌고 모든 매체가 영화를 다루고요. 하지만 과연 얼마나 영화에 대한 다양한 모습을 다루고 있는가는 미지수지요. 영화에 대한 다양한 욕구를 행복하게 담아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문화일보'와의 인터뷰
관계자 외 출입 금지, 만차... 어떠세요? 이런 문구를 보면요. 어쩐지 뒤로 물러나고 싶지 않으세요? 하지만요, 골목 안 어느 곳엔가 숨어 있어서 간판도 잘 안 보이고 입구가 어딘지도 잘 모르겠고 그런 작은 칼국수집, 선술집에는 언제나 누구나 선뜻 발을 들여놓을 수가 있습니다. 새벽 3시에요. 아직은 어둡고 쌀쌀하죠. 이 가을 골목길 누구나 쭈뼛거리지 않고 들어올 수 있는 작지만 아주 편안한 문 열어놓고 기다리겠습니다. 어서오세요. 반갑습니다. FM 영화음악 정은임입니다. 오늘 첫 곡 들려드리겠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래니 크래비츠, 'It Ain"t Over "Til It"s Over'.
2003년 10월 19일 다시 시작한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첫 방송 오프닝 멘트
부안 내부에서는 이미 핵 폐기물 유치에 대한 찬반이 갈리고 있는데, 투표가 민주주의가 아니라 투표에까지 가도록 치열하게 부딪치는 과정 자체가 민주주의라고 오현석 씨는 생각한다고 하셨어요. 동감입니다. 오현석 씨는 예전에 영화와 관련 없는 정체 불명의 사연을 우리 영화음악 게시판에 올려도 될까요 라고 한번 질문을 하신 바로 그분이시죠. 하지만, 우리가 영화를 통해서 우리 삶의 문제를 다시 직시하고 그 힘으로 우리의 삶을 다시 돌아본다는 의미에서 영화는 삶 전반에 대한 시각을 넓혀준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글을 올려주셨던 게 기억이 나네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삶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이유는, 매일매일 일어나는 작은 일들 때문이라는 것. 이건 진짜 맞더라고요. 사는게 작은 일들, 아주 사소한 일들이 뭉쳐져서 겹겹이 쌓여서 이루어지는 거잖아요. 그 하나하나를 신경 쓰지 못하면 삶 전체를 잃어버리는 거예요. 전 그렇게 생각이 들더라고요. 요즘은요.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단 한 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이여 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 안녕하세요?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나희덕 시인의 '서시'로 FM 영화음악 문을 열었는데요 서시... 우리 말로, '여는 시'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계속해서 시를 쓸 사람이 영원한 시작의 의미로 쓴 글이죠. 항상 아이러니해요. 이 끝 방송을 하게 되면 그래... 끝은 시작과 맞닿아 있다 하는 의미에서 이런 시를 골랐어요. 꼭 그 마음입니다. 단 한 사람의 가슴도 따뜻하게 지펴주지 못하고 그냥 연기만 피우지 않았나... 자, FM 영화음악을 듣고 있는 모든 분들을 위해서 오늘 첫 곡 들려드리겠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래니 크래비츠, 'It Ain"t Over "Til It"s Over'....
2004년 4월 26일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마지막 방송 오프닝 멘트
창문이 모두 영화 속 창문 장면으로 그려진 건물. 영화학을 하는 사람이 주인일까. '창문으로서의 영화'를 생각하게 한다. 구멍을 내어 바깥 세상을 보는 한 면을 제공하는 창문은 때때로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케케묵은 답으로도 쓰이니까. 그러나... 이 건물은 정말 멋졌다. 그 위에 걸린 하늘도.
2004년 6월 5일 싸이월드 '은임이 다락방'
"모든 사람이 입을 모아 테러리즘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합니다. 거기엔 아주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테러에 동참하지 않는 것입니다." '노엄 촘스키와의 대화'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에서, 오늘따라 눈에 띄는 대목이다.
2004년 6월 21일 싸이월드 '은임이 다락방'
예전부터 내게 빗길 운전은 '그림 속으로 들어가기'였다. 빗줄기가 형체를 허물어뜨린 풍경은 움직이는 파스텔화. 이제 나는 그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2004년 7월 5일 싸이월드 '은임이 다락방'
사실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대부분의 아름다움은 강렬하고 화려하고 찬란할수록 빨리 사그라들고 시들고 부서지지 않나요?
2004년 7월 19일 싸이월드 '은임이 다락방'에 남긴 마지막 글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 특히 아주 젊어서 세상을 떠나버린 사람들이 오래도록 마음속에 묻혀서 아름답게 기억되는 이유. 여러가지가 있죠? 그들은 더이상 실수나 과오가 없을 테구요, 또 배신도 변절도 하지 않을 테니까요. 너무 변하는 세상, 믿지 못할 사람들 속에서 결코 변하지 않을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은 참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10년전 우리 가슴속에 묻힌 후에 그는 한번도 우리를 배신한 적이 없죠. 리버 피닉스. 피닉스라는 그의 성이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져요. 23살. 그때 죽었지만 그렇게 참 불사조처럼 우리 마음속엔 이렇게 오래 살아 남아있네요.
<정은임의 FM영화음악>
올드 걸, 올드 보이를 만나다
출처 : 월간 《말》(2004-08-05)
글 : 이오성 기자
사진 : 허태주 기자
지난 12월 5일 저녁,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2003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식의 사회를 보기 위해 무대에 오르는 한 여성을 보고 누군가 중얼거렸다.
"정은임 누나다!"
삼십대 중반은 돼보이는 영화인의 입에서 터진 "누나" 소리가 어색하지 않은 것은 그 대상이 정은임 아나운서였기 때문이다.
정은임(35). 1992년 11월 「정은임의 FM 영화음악」이란 라디오 프로그램의 DJ로 매일 새벽 1시면 대중들 앞에 목소리를 드러낸 이래 그와 그의 방송은 하나의 "물결"이었다. 할리우드 상업영화 위주의 영화 소개로 일관하던 당시의 영화음악 방송 풍토에서 FM 영화음악은 날카로운 사회비판, 새로운
영화읽기로 1990년대 문화빅뱅의 시대를 진보적으로 지킨 상징이었다.
영화 「파업전야」가 특집으로 편성되는가 하면, 「인터내셔널」가 공중파를 타고 흘러나와 듣는 이의 귀를 의심하게끔 만들기도 했다. 고정 패널로 출연했던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와 정은임씨의 대화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진보적 영화읽기"의 텍스트가 되어 회자되곤 했다. "정영음"이란 고유명사로 불리우기도 했던 이 방송은 이념이 사라진 시대, 문화적 열정과 감수성을 배출할 길 없던 청년들에게 소중한 안식처였고 정은임은 그 안식처를 지키는 누이요, 연인이었다.
그가 마지막 방송을 진행하던 날 어느 중학생은 수학여행길에까지 커다란 라디오를 들고 가 여관방에서 들으며 눈물지었다. 그날 방송에서 정은임은 "꽃 지는 날 만났다가 꽃 피는 날 헤어진다"며 이별의 회한을 달랬다. 1995년 4월 1일의 일이었다.
달갑지만은 않았던 방송복귀
그리고 8년 6개월이 지난 2003년 10월 20일. 다시 「정은임의 영화음악」(MBC FM)이 돌아왔다. 매일 새벽 3시부터 4시, 그의 말처럼 "청취율의 사각지대"인 탓에 신경 쓸 것 없어 더욱 편한 심야에 그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겨울비 내리는 금요일 저녁, 동숭아트센터에서 만난 그에게 던진 첫 마디는 "꽃 피는 날 떠났다가 꽃 지는 날 돌아온 소감을 말해달라"는 말이었다. 감개무량의 감회를 기다렸던 기자의 기대와 달리 그는 "영화음악을 별로 맡고 싶지 않았다"고 답했다. 의외였다.
"걱정되는 일이 많아서 실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어요. 왜냐면 영화음악이라는 프로그램을 MBC에서 없애려고 했거든요. 지금 영화음악이라는 게 독자적인 무엇이 있는 게 아니고, 이런저런 음악을 삽입하는 수준이잖아요. 전세계적으로도 영화음악이라는 프로그램이 남아 있는 곳이 몇 곳 안 돼요. 그걸 몇몇 피디가 몸으로 막아내서 그나마 버텨왔죠."
걱정되는 일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8년 전 그가 영화음악 진행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 당시로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애청자들이 "정은임 복귀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나선 것이다. 최초의 대중매체 소비자운동인 셈이었다. 이들은 정영음의 사회비판적 내용과 진행자의 적극적인 노조활동 때문에 방송사 윗선에서 압력이 들어와 중도하차하게 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해 왔지만, 당시 입사 4년차의 방송 노동자에 불과했던 자신에게 쏟아졌던 유형무형의 "파장"은 감당키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유증"이 쉽게 가시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저와 영화음악을 연관지으며 회사 밖의 사람들과 달리 회사 안에서는 뭐랄까, 당시 그 사건을 해사행위 비슷하게 여기는 분위기였어요. 마치 제가 바깥의 사람들을 움직여서 어떻게 한 것처럼 사시를 뜨고 쳐다보는. 제가 결벽증 같은 게 있는 데 그런 오해가 부담스럽고 싫어서 "나는 정당하다, 차라리 방송진행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죠. 한번은 영화 관련 홈페이지를 만들려고 하는데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 적이 있어요. 내가 하는 어떤 사소한 일조차도 소영웅주의로 바라보는 식이었죠.
사실 2년 전에도 영화음악을 하기로 했다가 회사 내에서 잡음이 일어나 그만둔 적이 있어요. 손석희 부장님이 와서 "네가 영화 일을 안 하는 건 인력낭비다"라며 진행을 제안해서 하기로 했는데 또 주위에서 무슨 끈을 잡았다는 둥 하는 이야기가 돌았어요. 그때 제가 발끈해서 "나 그렇게 사는 사람 아니다 안 하겠다"고 했고, 그것 때문에 손석희 부장님과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아졌어요. 이미 보도자료까지 낸 상황이었으니까요."
다시 관 밖으로 나오다
예기치 않은 파장과 그로 인한 부담 속에 영화음악으로의 복귀를 주저할 무렵, 그에게 용기를 준 것은 또한 정영음을 사랑했던 이들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관 속으로 들어간 사람이니까 더 이상 관 뚜껑을 열지 말아달라고 말하곤 했어요. 하지만 그것은 제가 스스로 시체가 됨으로써 정영음을 사랑하던 많은 이들을 결국 "네크로필리아"로 만드는 일이 되고 말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가운데 지난해 정영음과 관련한 다큐를 찍게 됐어요. 거기에 함께 참여하면서 옛날 그 청취자들이 "지금은 어디서 뭘 하나" 이런 생각을 하며 마음이 달라졌지요. 게다가 이제 일 핑계대고 영화는 실컷 볼 수 있겠구나 싶어서 미끼를 덥썩 물었죠."
그렇게 영화음악실로 복귀한 지 2개월여. 11년 전과 비교해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할 터. 그에겐 과연 무엇이 달라졌을까. 아니 어쩌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라디오가 굉장히 어려졌어요. 가끔씩 무슨 이야기만 하면 "너무 이념적이지 않아요? 요즘 애들은 듣기 싫어해요" 이런 이야기들이 나와요. 무조건 청취자들 입맛에 맞추려고 하는 것 같은데 라디오는 솔직하잖아요. 요즘 다른 프로그램의 진행자들이 얼마나 사적인 이야기나 농담 따먹기 같은 멘트를 많이 하나요? 그런데 왜 제 생각을 드러내는 건 안돼죠?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제 일상 중의 하나거든요. 세상이 얼마나 모순적인데, 방송에선 여전히 예쁜 말만 골라서 해요. 그리고 우리가 그런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굉장히 즐기지요."
정은임은 가령 창사특집방송이나 불우이웃돕기 같은 코너에 아나운서들이 차출되어 나눔의 정을 호소하고 돈을 모으는 일을 동료들끼리는 "앵벌이 뛴다"라고 표현한다며 종국에는 끝까지 책임지지 않는 방송의 현실을 지적하기도 한다. 과거의 정영음이 그랬듯 방송과 사회의 모순이 첨예할수록 그의 목소리도 함께 떨리곤 한다. 복귀한 뒤 두 번째 방송을 하던 날의 오프닝 멘트를 듣고 기자는 가슴이 떨렸다.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겠다구요.
새벽 세 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백여 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봅니다.
올 가을에는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 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 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저 FM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고공 크레인 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김주익씨의 이야기를 전하며 그는 스스로 "고공 크레인 위에 혼자 겨우 매달린 기분으로"청취자들에게 말을 건넨다. 최신유행의 피곤한 수다로 점철되는 FM 방송에서는 물론, 여느 개혁적이라는 매체에서도 이처럼 애틋한 멘트는 듣기 힘들다. 단순히 싸구려 감수성으로 포장할 수 있는 깊이가 아닌 탓이다. 적지 않은 양의 방송 멘트를 써내려가는 일도 때때로 그의 몫이다. 그런 만큼 그에 따른 부담도 함께 돌아온다.
노동자, 그리고 8학군 기자들
(이하는 고공크레인 위에서 자살한 노조위원장 김주익 씨의 이야기를 전한 후 "네가 노동자에 대해 뭘 아느냐"라는 항의를 받고 정은임 아나운서가 이에 답하여 방송에서 말한 내용) "오늘은 이 이야기 안 하면 목구멍에 가시가 돋힐 것 같다는 날은 꼭 직접 써요. 영화도 시선이 다르면 달리 보이듯이 어차피 방송을 진행하는 제 시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굉장히 비난 많이 받았어요. 나더러 노동자에 대해 뭘 아느냐. 육체노동자로서의 노동자계급에 대해 뭘 아느냐고 이야기하더군요. 거기에 방송이나 언론의 허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이 세상은 마이크나 펜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계급적 기반에 따라 모든 것이 이뤄질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거야말로 정말 무시무시한 SF 영화 같은 세상 아닌가요. 모든 것이 나의 물적 좌표에 따라 바둑판처럼 이미 짜여진 세상. 너는 중산층이고, 한 달에 얼마 버니까 얼마 버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하라는 거죠. 그들을 동정하거나, 연민하는 게 아니라 주위에 손배가압류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 보면 괴롭고, 고민되고 그런 걸 이야기하고 다른 세상을 꿈 꿀 수 있는 거잖아요.
난 비록 잘 먹고 잘 살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한번 생각해 보자고 이야기할 수 없나요? 왜 "8학군 기자들" 이야기가 나오겠어요. 방송국에도 정말 8학군 출신 기자들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점점 뉴스에서도 시선이 한쪽으로만 흐르게 돼요. 노동자, 농민 이야기는 그들의 생리나 환경과 맞지 않아서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거기에 눈도 돌리지 않고. 말은 심각하지만, 그게 일상으로 돌아가면 전혀 심각한 게 아니거든요. 예를 들어 우리 옆에서 투명인간화되어 버리는 청소하시는 아줌마. 아저씨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뿐인데."
MBC 입사와 관련해 정은임씨에게는 한 가지 일화가 있다. 그가 입사했던 1992년은 MBC가 방송민주화를 내걸고 한창 파업 중이던 시기였다. 수습사원들에게 예의 노조불가입 각서가 강요됐고, 그는 입사동기 중 유일하게 방송사 간부의 요구를 거절하고 파업에 참여한 "강성"노동자였다.
그리고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네 살배기 아이의 엄마이자 노조의 간부(여성부장)로 재임 중인 그의 요즘 최대 관심사는 직장 탁아소를 설립하는 일.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다가 그가 관련 법률까지 직접 챙기며 일을 벌이자 주변에서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MBC 쯤 되는 거대 방송사조차 그와 같은 악바리가 나서지 않는 한 여느 직장과 다를 바 없는 셈이다. MBC에서 그를 만난 날도 저녁에 노조회의가 잡혀 있다며 굵은 서류뭉치를 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행복한 영화 읽기
1998년에 그는 방송활동을 잠시 접고, 미국으로 영화공부를 떠났다. 그가 미국에서 발표한 논문제목은 "한국의 영화마니아". 1990년대 초반 정영음을 통해 일군의 영화마니아를 배출했던 당사자이기도 한 그에게 한국 영화와 영화마니아들의 모습은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
"일단 영화판이 엄청나게 커졌죠. 영화라는 것의 속성이 어차피 상업적이에요. 어떻게 보면 상업성 일변도로 가고 있긴 하지만. 대중들은 예전과 크게 차이 나는 건 없다고 봐요. 예전에도 영화를 진지하게 보는 계층이 20%밖에 되지 않았죠. 문제는 커다란 강이 있으면 거기에 맑은 물을 공급하는 지류가 있어야 문화적 자생력과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는 것일 테죠. 그런 지류들의 움직임이 아직은 제 기를 못 펴지만 점점 나아지리라 생각해요. 그래서 독립영화 같은 데서 그런 움직임을 발견해요. 우리 프로그램에서도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소수일지라도 이런 게 있다는 걸 알려야죠. 그게 미디어의 기능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게 엄청난 사명감이 아니라 그런 느낌을 자연스레 말하고 전하는 일련의 행위들이 행복하게 느껴져서 하는 일이어야 한다는 게 중요해요. 가령 박찬욱 감독 같은 경우 평론가 시절에 만났을 땐 말 잘 하고, 글 잘 쓰는 사람이긴 했지만, 참 빌빌거렸거든요(웃음). 그런데 지금 보면 저렇게 훌륭한 감독님이 돼 있잖아요. 그런 성장의 모습을 확인하는 게 즐겁고, 행복하죠."
아닌 게 아니라 정은임씨는 최근 본 영화 중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를 수작으로 꼽는다.
"「올드보이」를 보면서 송두율 교수를 떠올렸어요. 괴물이란 존재는 어떤 사회나 집단에서 허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걸 뜻해요. 외적인 측면이 아니라 생각이나 사상 모든 것들이. 영화 마지막을 보면 결국 최민식에게 근친상간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 것으로 나오거든요. 말하자면 괴물로서의 그 삶의 기억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거죠. 그렇다면 최면을 거는 사람이 어쩌면 감독의 다른 모습은 아닐까. 감독은 최민식이 괴물인지, 혹은 그를 괴물이라고 규정하는 우리 사회가 괴물 같은 것인지 말이죠. 수잔 손택은 해석에 반대한다고 이야기했지만, 지금은 해석의 시대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한 영화가 아주 다양하게 해석되는 건 당연하고요, 심지어 어떤 관객에게는 불쾌감을 줄 수 있다는 것마저도 좋게 느껴지더군요."
올드 보이와 올드 걸의 연대
이 쯤에서 "올드 보이와 관련해"(?) 정영음과 『말』독자들에게 한 가지 "뉴스"를 알려야겠다. 그건 올 1월부터 영화평론가 정성일씨도 정영음에 "복귀"한다는 사실이다. 정영음의 방송재개 이후에도 꾸준히 "정성일씨를 출연시켜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는 정영음의 극성팬들에겐 더없는 희소식일 터. 그런데 정성일씨가 복귀하게 된 과정엔 정은임씨의 노력이 숨어있었다. 이를테면, "소녀, 소년을 꼬시다" 정도가 될까.
"복귀하면서 정성일씨에게 메일을 보냈어요. 같이 해보자는 이야기였죠. 그런데 돌아온 답장이 "나는 이제 올드 보이다"라며 고사하는 내용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무슨 소리냐, 나는 관 속에서 기어나온 사람이다. 나야말로 "올드 걸" 아니냐고요(웃음). 그렇게 곡절 끝에 일단 한 달 동안만 함께 하기로 했어요."
누군가 한때 "한국에서 영화광의 여러 단계 중 그 첫 번째 단계는 정은임의 영화음악을 듣는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한때 영화광의 1단계에 진입했던 "올드 보이"들은 영화광의 나머지 단계의 진입에 성공했을까. 그리고 한국영화판을 바꾸기 위한 "올드들의 연대"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할까. 거기까진 알 수 없지만, 이제 삼십대 중반을 넘겨 "올드 걸"의 반열에 오른 정은임씨의 경우 "열린 영화광"의 단계에 진입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그것은 또 신성한 "어머니"의 모습이기도 했다.
"예전엔 바보였어요. 절대적인 진리를 믿었죠. 내가 생각하는 시스템이나 생각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남들을 용납하지 않았아요. 누군가는 그걸 매력이라고 했지만요. 그게 아이를 기르면서 달라졌어요. 과거에 나는 너무 나만의 언어로만 세상과 사람을 이해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아이의 언어를 하나둘씩 이해해 가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세계가 있고, 그런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려 하는 게 소중하다는 걸 깨닫습니다. 정말요."
[감성 25시] 정은임
출처 : 주간한국 (2004-04-14)
그녀는 왜 터키에 간다는 것일까? 그녀는….“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곳, 지리적으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곳이지만동양도 서양도 아닌 곳이죠. 어디에도 속하고, 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나라, 생의 비밀이란 보물이 찬란하게 빛날 것 같은 나라. 그래선지 호기심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나라죠. 저, 터키에서 살 거예요.”이 때 정은임 아나운서는 정의할 수 없는 나라 ‘터키’ 같았다. 꿈꾸는듯한 눈, 살포시 들어간 보조개, 기다란 목선과 너무 여려 보여 금세 날아갈 것만 같은, 물푸레나무 한 잎 같이 쬐그만 여자. 오규원님의 ‘한 잎의여자’라는 시 한 구절이 절로 떠오르는 여자.
정은임을 기억하는가? MBC 5시30분 ‘우리말 나들이’란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 표준어를 소개하는 아나운서를 최근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자칫 잘못 쓰게 되는 언어를 교정해 주는 프로그램인지라 그녀가나오면 화면에 몰두하게 된다. 사실, 이유는 그뿐 만이 아닐 게다. 솔직히그녀는 지적인 이미지의 얼굴 예쁜 아나운서니까.
- 젊음과 열정으로 기억되는 아나운서
정은임을 이야기 하려면, 라디오 프로그램을 빼놓을 수 없다. 라디오를 말하지 않으면 ‘정은임이 아닌 것’이다. MBC FM4U(91.9MHZ) ‘FM 영화음악정은임입니다’의 주인으로 92년 11월 2일 첫 방송을 시작해 95년 4월 1일마지막 방송을 한 뒤, 다시 옛자리로 돌아온 아나운서.(그 사이는 미국 노스트웨스턴 대학에서 ‘한국의 영화 마니아’라는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결혼과 출산 등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그녀가 없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자체 활동을 해왔던, ‘정영음’(정은임의영화 음악)동호회 회원들의 마음속에선 정은임은 아직도 영화음악을 진행중인 아나운서였다. 볼셰비키가 부르던 인터내셔널가가 영화 음악으로 소개되었을 때 마음속에서 ‘혁명’이란 단어를 은연중에 떠올리게 했던 그녀다. 밤에 쓴 편지는 부치지 말라는 말이 있던가. 그녀는 영화 음악을 통해 숨겨진 감성을 하나씩 꺼내놓고 자신만의 언어로 세상에 편지를 쓰기시작했다. 꾸준히 그녀의 방송을 듣는 사람들은 각자가 세상의 ‘투사’가되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녀는 젊음과 열정의 코드였다. 92년 입사한 정은임이 처음 맡게 된 프로그램이 바로 MBC FM 영화음악이다. 젊은 정은임은 그곳에 자신의 열정을쏟아 부었다. 그녀의 감성과 이성은 시대가 요구하는 ‘정신’으로 똘똘뭉쳐 있었다. 수습사원 시절 노조 가입 포기 각서를 거절한 이력도 갖고있다. 옳지 않은 길은 가지 않는 것이 정은임이고, 옳지 않음에도 가야 한다면, 그녀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한가지뿐이었다. 95년 4월 1일 “정은임은 여기서 인사 드릴게요”라는 눈물겨운 인사를 마지막으로 잠시떠나게 된다.
그녀의 떠남은, 많은 소문들을 안겨주었다. 울먹이던 마지막 멘트가 MP3파일로 저장되어 인터넷에 떠돌았고, 그녀의 떠남이 ‘강제 퇴출’이란 흉흉한 소문도 있었다. 그 당시 PC통신 정영음 동호회는 ‘정은임 복귀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서명운동에 들어갔고, 일간지에서는 그들의 움직임을뉴스거리화 했다. 혹자는 그녀를 ‘실패한 혁명가’라고 거창하게 말하기도 했다. 어찌됐든 그것은 사건이었다.“예전에는 재기발랄한 영화를 좋아했어요. 이젠 영화를 만들든, 책을 쓰든, 방송을 하든, 그 무엇을 하든지 사람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문화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에게 못할 짓 하면서 얻어내는 특종 같은 거, 누군가를 상처 입히는 거, 위험한 일이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예요.”정은임은 세상의 움직임에 예민하다. 후배 아나운서 김태희의 죽음과 추문에 휩싸인 선배 홍은철 아나운서의 일로 그녀는 충격을 받았고, 무척이나힘들었다고 한다. “사람의 본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된 계기죠. 또한대중의 속성은 무엇인지, 사람이 뭉쳤을 때 과연 어떤 효과가 일어나는지, 그때 대중은 본질을 잃고 얼마나 잔인하게 변해가는지. 탄핵안이 가결된사건과 그 후 대중들의 움직임이 모두 눈앞의 현실로 나타나니 너무 힘들었어요. 어찌해야 하나, 이 움직임을 도대체 어찌해야 하나….”
- 딸 부잣집서 키운 문학적 감성
그녀의 감성은 어릴 적 집안 분위기의 영향이 크다. 정은임은 딸만 넷인집의 둘째다. 딸 부잣집 딸들이 대개 그렇듯, 작은 아씨들의 네 자매처럼자랐다고 한다. 네 딸은 모이면 서로 배역을 정해 연극을 하는가 하면, 피아노를 치고 시를 낭독하며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나갔다.
아버지도 문학과 영화에 조예가 깊은 감성적인 분이었다. 아버지의 서재에 빽빽이 꽂혀 있던 옛날 책들과의 만남은 딸을 문학의 세계로 인도했다. 그곳에서 러시아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만났고, 프랑스 문학을접했고, 셰익스피어의 고전을 읽었다. 또한 정은임은 ‘골방 탐험기’를통해 부모님의 젊은 시절을 만나곤 했다. 어머니가 펜팔하던 미국 친구,아버지의 낡은 책과 밑줄 그어진 부분 따라 읽기와 작은 글씨로 씌여진 아버지의 메모 찾기, 또한 부모님의 연애편지까지 탐독한 정은임은 자연스레문학과 친해지면서 감성을 지닌 철학적인 아이로 성장했다.“터키로 여행을 갔어요. 남편과 약속을 했죠. 별 세 개짜리 이상 숙소에서 묵기로…. 물론 듣지 않았어요. 그 나라 사람들의 진짜 모습을 알려면서민문화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우린 서구문화에 익숙해져서 전통(서민)문화를 차츰 잊어가는 건 아닌지 아쉬움이 남더라구요. 여행지에서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어요. 이슬람인, 독일 청년, 프랑스 게이…. 모두 제각각 삶의 고민이 있는 사람들이었죠. 여행은 낯선 사람과 금세 친구로 만들어 주는 매력이 있어요.”작년 봄 5살 난 아이와 남편을 두고서 혼자 배낭여행길에 오른 그녀. 낯선이국의 땅, 터키에서 그녀는 어떤 보물을 찾으려 했던 것일까. “마음의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었어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언지, 그걸찾고 싶었어요.”정은임은 그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에게 아련한 ‘아우라’ 같은 존재다.
새벽 3시에 영화음악을 듣는 사람이라면, 잠시 추억에 잠기고픈 그 시절그 사람이거나, 잠을 거부하는 요즘 세대일 것이다. 정은임은 이제 세대와상관없이 잠들어 있는 당신의 감성을 깨우는 인생의 선배이자, 언니 같은다정한 아나운서다. “안녕하세요. 정은임이예요.” 오늘 새벽,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당신의 감성을 노크할 것이다.
유혜성 자유기고가 cometyou@hanmail.net




나의 낙서
글 : 임준형
이 정은임 아나운서라는 분의 방송을
이 분이 죽은지 3년만에야
처음으로 들어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던 분이
그렇게 꽃다운 나이에 그렇게 덧없이 죽어야했다는 사실이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들게 하더군요.
이미 돌아가신 분의 추억을 쫓아 몇 시간을 헤매고 다녔고
그 흔적을 이곳에 정리합니다.
(2007-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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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7/05/11 23:30 | 영화 인물 사전 | 트랙백 | 핑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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